나는 주차장에서 슈퍼카를 제외하고는 비싸거나 적어도 깨끗하게 관리된 신차 옆자리를 선호한다. 옆차 탑승자가 무심하게 차문을 열어젖히다가 내 차에 남기는 흠집인 '문콕'을 피하기 위해서다. 내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비싼 차를 타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어서도 아니고, 싼 차를 타는 사람들이 배려가 없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.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심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지만, 자신의 소유물을 아끼는 이기심은 거의 모두가 틀림없이 가지고 있다. 잘 관리된 차에 탑승하는 운전자는 자기 차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어서라도 문을 조심히 연다.

물론 낡은 차에도 애정을 쏟는 사람도, 비싼 차도 함부로 다루는 갑부도 있다. 이상적으로는 본인 차는 막 다루더라도 남의 소유물만큼은 소중히 대하는 상식적인 사람도 있긴 하다.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다수는 아니다.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자기 물건을 남 물건보다 더 소중하게 다룬다. 게다가 소유물에 대한 애정은 소유물의 가치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. 애정을 판단하는데 유용한 또 다른 척도는 세차나 흠집 상태다. 흠집은 처음 참아내기가 어렵지 한두개 생기다보면 자연히 포기하게 된다. 내 것도 아끼지 않게 되었는데, 다시 보지도 않을 남의 차문에 내는 자국에 연연하겠는가...
이상의 경향은 확률일 뿐이지 필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. 그래서 편견에 희생되는 억울한 사람도 생긴다. 하지만 그 편견이 그들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. 나는 내 옆차 차주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기에, 그래서 통계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.
나는 낡은 경차를 탈 때에도 다른 차에 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녔다.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결국엔 포기하는 수많은 문콕 자국들은, 사회의 평균은 그 정도 상식에 미치지 못했음을 명백하게 알려준다. 고급차 차주는 그만큼 돈을 모으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으니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로 문콕을 만들 것이고, 낡은 차 차주는 남에게 베풀다가 돈을 못 번 것이니 남을 배려할 것이라는 판단은 동화만큼이나 순진하고 어리석다.
부자와 빈자, 어느 쪽이 더 이타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, 이타심 자체가 확신할 수 없는 드문 성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어른이 된다.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선악 구별은 실패하게 된다. 내 차에 흠집이 나지 않는다는 명확한 목적을 위해서는, 이기심만을 믿을 수밖에. 나는 꾸며낼 수 있는 이타심을 강조하는 말보다, 개연적으로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이기심이 어떤 형태로 작용할 것인지에 관심이 있다. 봉사활동 경력보다는 전과기록을 더 중요하게 보듯이.